삼성·LG, 유럽 가전 16곳과 EU에 규제 완화 요구
삼성전자·LG전자가 밀레·다이슨 등 유럽 가전 16곳과 함께 EU 집행위에 공개서한을 보내 친환경 규제 완화와 산업 전략 수립을 요구했다.
삼성·LG는 왜 유럽 경쟁사들과 손을 잡았을까?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밀레·다이슨·일렉트로룩스·베코 등 유럽 주요 가전 기업 16곳과 함께 EU 집행위원회에 공개서한을 보냈다. 유럽가전제조협회(어필리아·APPLiA)를 통해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에게 전달된 이 서한은 '유럽 가전 산업 전략 수립'을 요구한다. 친환경 규제와 에너지 비용이 제조 현장을 압박하자, 평소 시장에서 경쟁하던 기업들이 정책 대응만큼은 한목소리를 낸 것이다.

목차
어떤 배경에서 공개서한이 나왔나?
유럽은 세계에서 가전 규제가 가장 촘촘한 시장이다. 2024년 7월 기존 에코디자인 지침을 대체한 에코디자인 규정(ESPR)이 시행되면서 에너지 효율뿐 아니라 내구성·수리 용이성·재활용 소재 함량·탄소발자국까지 의무 기준으로 편입됐다. 여기에 치솟는 에너지 비용과 국가별로 조각난 규제가 겹치며 제조원가 부담이 한계에 다다랐다.
어필리아는 이런 압박이 실제 생산기지 이탈로 이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일부 기업이 유럽 밖으로 공장을 옮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서한에 이름을 올린 16개사는 친환경 목표라는 명분과 산업 현실 사이의 간극을 방치하면 유럽 제조 기반 자체가 흔들린다고 경고했다.
Samsung and LG joined 14 other appliance makers in urging the EU to close the gap between its green ambitions and manufacturing reality.
기업들이 EU에 요구한 핵심은 무엇인가?
서한의 핵심은 가전 산업이 EU 산업 전략에서 배제돼 있다는 문제 제기다. 어필리아는 가전 분야가 "친환경 목표와 산업 현실 사이의 정책 공백"에 갇혀 있다고 표현했다. 반도체나 배터리 같은 전략 산업이 대규모 지원을 받는 동안, 100만 명을 고용하는 가전 산업은 별도 전략 없이 규제 부담만 떠안았다는 불만이다.
이들은 경쟁력 회복을 위해 4대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통합 산업 전략 수립, 자금 지원, 산업 클러스터 형성, 그리고 공정한 무역 기준 설정이다. 특히 규제 단순화를 강조했는데, 중복되는 표준과 잦은 규정 개정이 기업의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다.
The 16 firms asked for a dedicated EU action plan covering industrial strategy, funding, clusters, and fair trade rules.
유럽 가전 산업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어필리아에 따르면 유럽 가전 산업이 EU 경제에 기여하는 규모는 790억유로(약 132조원)에 이른다. 역내 130개 공장을 운영하며 약 100만 개의 일자리를 떠받치는 핵심 제조 축이다. 그럼에도 산업 전략에서 소외됐다는 것이 서한의 근거다.
규제 부담이 커지는 흐름도 뚜렷하다. 2026년에는 건조기 에너지 등급 재조정이 8월에, 세탁기·식기세척기 위임법 개정이 예정돼 있다. 소비자 측면에서는 에코디자인·에너지 라벨 규제로 2020년 가구당 연 182~266유로를 절감했고 2030년에는 473~736유로까지 늘어날 전망이지만, 그 편익의 상당 부분은 제조사의 준수 비용으로 상쇄된다.
시장 경쟁도 치열하다. 출하량 기준 유럽 시장은 삼성전자(18.1%)가 선두, TCL(14.2%)·하이센스(12.1%) 등 중국 기업이 뒤를 잇고 LG전자(10.5%)가 4위권이다. 유럽이 전체 빌트인 가전 시장의 약 40%를 차지하는 최대 시장인 만큼, 규제 환경이 곧 삼성·LG의 실적과 직결된다.
Europe's appliance sector adds 79 billion euros to the EU economy and runs 130 factories, yet says it is sidelined in strategy.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폰데어라이엔 집행위가 별도 가전 산업 액션플랜을 채택할지가 1차 관건이다. 반도체법·핵심원자재법처럼 가전을 전략 산업으로 지정하면 자금 지원과 규제 유예의 길이 열린다. 반대로 친환경 기조를 유지한다면 기업들은 생산기지 재편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크다.
삼성·LG에는 양날의 검이다. 규제가 완화되면 유럽 현지 생산·판매 부담이 줄지만, 고효율·빌트인 프리미엄 전략 자체는 유럽의 까다로운 기준 위에서 차별화 우위를 만들어 왔다. 결국 규제 완화 요구와 프리미엄 포지셔닝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것이 한국 기업의 과제가 될 전망이다.
Whether Brussels grants a dedicated action plan will shape Samsung and LG's balance between cost relief and premium positioning.
이 서한은 한국 가전 산업에 무엇을 시사하는가?
이번 공개서한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유럽 토종 브랜드들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이다. 밀레·일렉트로룩스·베코는 유럽 시장에서 삼성·LG와 진열대를 두고 다투는 경쟁자다. 그런 기업들이 규제 대응에서만큼은 국적을 넘어 공동 전선을 형성했다는 점은, 유럽 가전 규제가 개별 기업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이미 넘어섰음을 방증한다. 경쟁과 협력이 동시에 작동하는 이른바 '코피티션(coopetition)'의 전형적 장면이다.
두 회사가 이 대열에 합류한 배경에는 계산이 깔려 있다. 삼성·LG는 그동안 유럽의 까다로운 에너지 효율 기준을 프리미엄 차별화의 무기로 삼아 왔다. 고효율·저소음·빌트인이라는 강점은 규제가 높을수록 오히려 중국 저가 브랜드와의 격차를 벌리는 방패였다. 그럼에도 규제 완화 요구에 동참했다는 것은, 현재의 규제 속도가 그 방패 효과를 넘어 제조원가를 위협하는 단계에 진입했다는 신호로 읽힌다.
한국 기업 입장에서 관건은 균형이다. 규제가 완화되면 단기적으로 비용 부담이 줄지만, 규제 장벽이 낮아질수록 중국 브랜드의 유럽 진입 문턱도 함께 내려간다. 출하량 기준 유럽 시장에서 이미 TCL·하이센스가 삼성 바로 뒤를 추격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삼성·LG에게 유리한 시나리오는 '규제 완화'보다 '규제의 예측 가능성 확보'에 가깝다. 잦은 규정 개정과 국가별 중복 표준을 정리해 달라는 요구가 서한의 핵심에 놓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이번 서한은 한국 가전이 유럽에서 단순한 판매자가 아니라 산업 정책의 이해당사자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Samsung and LG standing beside their European rivals signals that regulatory predictability, not just deregulation, is now the real battleground in the EU appliance market.